죽은 인간...... 내내 생각난다.
누구를 만나... 누구와 대... 나누든
불쑥... 쑥 켜지도 않은 영상이 재생된다.
멈추고 싶...도 멋대... 재생돼...
달리 방법이 없다.
망연하게 보는... 밖에.
이 오류 원인... 알고 있나?
너도 이미 알고 있잖아. 그게 그리움이라는 걸.
서가를 기웃거리다
천선란이라는 이름을 발견했다.
낯설지 않음에 책을 꺼내 작가 소개를 읽었다.
작품 목록에서 <천 개의 파랑>을 본 순간,
작년 말, 따뜻하게 읽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 좋았던 감정이 이 책을 읽게 만들었다.
1. 작가
천선란 (1993.7.7~ )
2019년 웹소설 플랫폼 '브릿G'에서 <무너진 다리>를 연재해 SF 부문 1위를 차지하고
내가 읽었던 2020년 <천 개의 파랑>으로 한국과학문학상 대상을 수상했다.
천선란은 본명이 아니라
필명으로 어머니, 아버지, 언니의 이름을 한 글자씩 조합해 만든 거라고 한다.
동식물이 주류가 되고 인간이 비주류가 되는 지구를 꿈꾸는 사람.
17살, 소설가가 되고 싶어 부모님의 허락도 없이 안양예술고등학교에 편입했다고 하니
어릴 때부터 글에 대한 열망이 컸었나 보다.
그 열정을 응원합니다!
천선란 작가님!
+ 작품 목록 +
무너진 다리(2019)
어떤 물질의 사랑(2020)
천 개의 파랑(2020)
나인(2021)
노랜드(2022)
랑과 나의 사막(2022)
이끼숲(2023)
2. 줄거리
때는 2844년,
오지랖 넘치는 10살 '랑'에 의해
모래 속에 파묻혀있다 구출된 로봇 '고고'.
랑의 엄마 '조'와 함께 사막에서 살게 된다.
인간의 유한한 삶 때문에
조와 랑은 죽음을 맞이하고 고고는 홀로 남겨진다.
랑의 죽음을 함께 정리한 '지카'로부터 바다로 가자는 제안을 받지만,
고고는 이를 거절하고 <과거로 가는 땅>으로 향한다.
과거로...
랑에게 돌아가기 위해서...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서 '버진'을 구한다.
어디든 가지만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않는 목적 없는 삶.
그래도 살아가는 그를 응원한다.
시체를 발견하고는 다른 이들에게 방해되지 않도록
다시 묻어주면서 오지랖, 랑을 또 생각한다.
그리워한다.
사막에 길을 내는 트랙터를 온몸으로 부딪혀 조종하는 로봇 '알아이아이'.
불가능한 일임을 알지만 자신의 존재 이유 때문에,
자신을 만든 사람, 카일과의 약속 때문에,
몸을 망가뜨리기까지 하면서 임무를 수행 중이다.
그런 알아이아이를 위해 자신의 한 팔을 떼어주게 된다.
랑을 그리워하는 자신과 겹쳐보였던 것인가.
알아이아이와 헤어지고
고고는 모래폭풍우에 정신을 잃지만,
다른 별에서 온 인간, '살리'에 의해 구출된다.
그의 도움으로 과거로 가는 소용돌이로 들어가며 소설이 끝난다.
이때, 자신이 왜 만들어졌는지 알게 된다.
고고는 과거로 돌아갔을까?
아님, 소용돌이에 의해 파괴되었을까?
또 다른 세상으로 이동되었을까?
엔진이 꺼질지언정
어떻게든 과거로 돌아가 랑을 만나기를 포기하지는 않았을 것 같다.
또, 그 과정에서 사람을 끌어안아 위안을 선사하는 오지랖을 계속 부릴 것 같다.
자신이 만들어진 이유를 잊지 않을 것 같다.
3. 발췌
P9 첫 페이지
태어나는 것과 만들어지는 건 그렇게 다르다. 태어난다는 건 목적 없이 세상으로 배출되어 왜 태어났는지를 계속 찾아야 하는 것이기에, 오로지 그것뿐이기에 그 해답을 찾는 시간만큼 심장의 시계태엽은 딱 한 번 감겼지만 만들어진다는 건 분명한 목적으로 세상에 존재한다. 이유를 찾아야 할 필요도 없이 존재하는 동안 끊임없이 자신이 목적을 이루어야 하는 것. 그렇기에 목적을 다할 때까지 망가지지 않도록 만들어진 것은 계속 엔진을 교체할 수 있는 것이라고 랑이 말했다. 그 말은 목적을 다하면 꺼버린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하지만 랑은 거짓말을 했다.
로봇은 만들어진다.
그럼 어떤 목적을 갖고 있을 것이다.
고고는 자신의 목적이 랑을 행복하게 해주는 거라고 했다.
그래서 랑이 죽었는데, 자신의 엔진이 돌아가는 것을 목적에 어긋난 거라고 생각해 랑의 말을 거짓말이라고...
작가의 말 중에서,
"단 하나였던 삶의 목적을 잃은 후에도 계속 살아가야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지구의 환경조차도 삶에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 고고에게는 랑이 세상의 전부였고, 랑이 고고에게 다음 목적을 만들어주지 않고 떠난 탓에 고고는 덩그러니 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그대로 툭 놓인 상태의 덩그러니. 그렇게 삶의 선택지가 랑 하나였던 고고는 결국 또다시 랑을 자신의 유일한 목적으로 둡니다. 그렇게 여정을 떠난 고고에게 랑이 아닌, 고고의 목적을 만들어주고 싶었습니다."
P49
랑은 스스로를 다시 맞추고 있는 거야.
진짜 자신의 형태가 무엇인지.
어떤 형태가 자신과 더 잘 어울리는지 알기 위해서.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랑의 깊은 곳에서 일어나고 있으므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기다리는 것밖에 없다고 말했다.
섣불리 랑의 내면에 들어가려 했다가 영원히 세계가 닫힐 수도 있으므로, 그러니 기다려야만 한다고...
랑의 사춘기뿐만 아니라
모두의 평생이 저런 모습이지 않을까?
시기, 빈도, 강도 등이 다를 뿐.
P68
안다는 게 대체 뭔지.
알고 싶다는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해.
자네도 알아야만 하는 저주에 걸린 거야.
인간을 본떴으니까.
맞다. 좀 몰라도 되는데 왜 다 알아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이들에게 내가 저주를 걸었던 건가... ㅠㅠ
P103
불가능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카일이 제게 그 일을 맡겼을 때부터 말입니다. 중요한 건 결과보다 행위입니다.
나는 가능한가. 고민해 본다.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지속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죽은 이를 만날 수 없다는 알면서 그리워하는 것과 비슷하려나.
그만하고 싶어도 그만둘 수 없는 것.
P134
완벽하지 않더라도 보기에 그럴싸하면 돼. 네가 감정을 진짜 느끼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아. 내가 느끼기에, 그 애가 그렇게 느끼기에 그렇다면 된 거야. 안 그래? 그냥 다 따라 하는 거야. 인간이라고 상대방에게 감정이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알겠어? 영혼을 뺏어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상대방에게 감정이 있다고 믿는 순간 생기는 거야. 그러니까 너도 시치미 떼. 감정도 네 것이라는 듯이 행동해. 결과보다 행위가 중요하듯, 감정을 느끼는 정확한 지점보다, 감정을 따라 하는 행위가 중요한 것이다.
흘러가서 상대에게 전해진다면 감정이려니~
P136 그리움에 대해 살리가 한 말
그거 정말이지 못된 감정이야. 시효도 기어. 우리를 뜨겁게 하는 것들! 사랑! 질투! 원망! 이런 건 다 금방 증발하는데 우리를 하염없이 가라앉게 만드는 이 감정은 정말이지 너무너무 길어. 그래서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체는 잠잠해지나 봐.
P143
나 드디어 네가 기억났어. 네가 어떤 로봇이었는지! 너는 전쟁시대에 만들어졌어! 너는 그곳에서 전쟁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을 살리는 일을 했어! 사람을 사랑하고 살리는 일을 했어! 너는 사람을 끌어안아야 하는 로봇이었어. 두 팔로! 네 팔은 다른 로봇의 팔과 달라. 인간을 안았을 때 안정감을 줬어. 너는 그 팔로 인간의 마음을 안았어! 고고, 너는 랑을 진심으로 사랑했던 거야! 네 마음은 진짜야!
따뜻한 위로를 전했던 로봇.
어느 인간보다 인간답다.
4. 마무리
인생의 목표가 없더라도 일단 살아보는 거다.
언제 툭하고 내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그게 없어도 살아갈 의미가 없는 건 아니다.
결과는 없지만 행위들이 있으니 그 삶 또한 어디론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친절하고 다정한 끌어안기는 큰 위로가 된다.
인간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기에 이만한 것이 없는 듯하다.
오지랖이 민폐 인가 고민을 하는 시대이긴 하다.
그래도 일단 내가 부릴 수 있는 오지랖은 너무 망설이지 말아야겠다.
그게 다른 사람의 삶에 작은 위로라도 된다고 다행이고
민폐였다면 사과라는 좋은 방법이 있다.
두껍지 않아
누구나 쉽게 시도할 수 있고,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는 책이다.
천선란 작가의 글은 언제나 포근하다.
- 저자
- 천선란
- 출판
- 현대문학
- 출판일
- 2022.10.25